산 아래에서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야생묘 답지 않게 털빛이 깨끗하고 윤이 납니다.
몸집이 작아 아직 어린 고양이 일 듯 합니다. 야생에서 태어나 에미는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인지.
나를 보더니 골골 거리며 다가와 몸으로 다리를 슬쩍 스칩니다. 먹이를 청하는 걸까?
내게 줄만한 먹을 거리가 있을리 없습니다. 몇 번 주위를 맴돌다가 포기하고 따라 오지는 않습니다.
아 조금 더 가니, 음식을 담는 플라스틱 용기가 있습니다.
바닥에 물이 조금 담겨 있는데, 요 몇칠 비는 내리지 않았으니, 이슬이라도 모였던 것인가,
누군가가 아침 마다 먹이를 가져다 준 듯 합니다 그래서,- 아마 비슷해 보이는 - 내가 그 아줌마 인 줄 알고 반가워 했던 걸까?
보경 스님 의 세번째 고양이 책에는, 암컷 고양이 이쁜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 주인공 수컷 냥이 대신에 암컷들은 이름만 대를 이어받고는 출산하여 새끼를 낳아 좀 자라면 홀연히 떠나가 버린답니다. 다정다감하신 스님은 남겨진 아기들이 애처러워 정성을 다해 보살 피면서도,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져버린 어미 이쁜이들을 애닲아 합니다. 그녀들은 나뭇잎이니 덤불들이 엉겨 붙어 지저분한 몰골로 다시 나타나, 경계하면서 사료를 챙겨 먹고, 다시 사라지거나, 배가 불룩해져서 돌아와 새끼를 낳고 보살피다가 또 떠난답니다.
" 저녀석은 본래 없는데 환영으로 만났던 것일까, 단풍이 지고 계절이 바뀌는데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이쁜이 들은 왜 떠나가는 것인가, 왜 고양이들은 어둡고 음습한 숲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왜 엄마가 안 돌아 오는지 묻는 새끼 냥이 들에게 , 스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 그는 고양이들과 대화하는 명상 학교를 엽니다)
" 보통의 고양이 가족들은 엄마는 새끼가 어느정도 자라면 자기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이 떠나더라고. 어린새끼가 야지로 내 몰리는 것 보다는 어른인 자기자신이 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이쁜이는 정기적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시간에 울면 스님은 나가 사료를 챙깁니다.그러나 어쩌다 소홀해지면 그대로 멀어 집니다. 고양이의 생각은 바람과 같아서 불현듯 옮겨가고 지난 과거는 머릿속에 없습니다. 그래서 낯선곳이라도 태연하게 자리 잡고 살아 갈 수 있습습니다.
그렇게 이쁜이와의 시간을 놓친날, 무상한 생각으로 숲을 바라보다가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다 하는 안도감입니다.
인간은 얼마나 무용한 생각에 붙들려 ,관계에 굳건한 다리를 놓고 그것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무형의 교류를 왜 의심하고, 조바심을 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