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의 서사극이나, 세익스피어의 희곡, 괴테와 톨스토이의 소설들이
시대를 걸치면서도 변함없는 감동을 주는 위대한 명작이라고 말하지만,
대중을 위한( 문학을 향유 할 수 있는 특정집단) , 그 시대의 트랜드를 담아내는 오락거리 들 이었습니다.
수많은 매체들로 인해 직접적인 재현mimesis이 가능 한 지금 시대에는
문학의 특수성인 암시 의 기능이 드라마를 만드는데 별로 필요 하지 않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미디어에서는 아예 드라마라는 장르가 사라질 듯 보입니다.
배우들이 일상의 공간에서 자기 의 모습을 보여 주는 리얼리티 쇼가 대세입니다.( 물론 연출이 개입 되지만, )
모르는 세계, 를 이해하려는 연결고리를 애써 찾을 필요도 없이 적나라하게,
사는 모습 그대로 정제되지 않는 말로 수다를 떠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 높은 시청률을 올리는 감각은 존경합니다만)
우리는 문학으로 말배우기를 훈련했습니다.
쿠오레의 사랑의 학교나 에리히 케스트너의 날으는 교실에서 우정을 키우고
햇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 순종과 자각 의 차이를 고민했으며
워터링하이츠의 히스클리프나 제인에어 의 연애를 꿈꾸었습니다.
젊은날의 초상처럼 방황하고, 게오르규의 25시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 권터그라스의 양철북으로 부조리한 세상을,.
부초(한수산)나 지구인(최인호) 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에게서 공유할 수 있는 비애를 체험합니다.
빙점이나 그 해 겨울은 따듯 했네로 원죄의 낙인을 자각합니다.
" 창의력은 매일 물을 주면 자라는 나무이다.
' 예술가는 사물의 느낌을 담아 두는 그릇' 이라고 피카소가 말하였다.
작가는 매일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한다.
보고 느낌이 없으면 기억 되지 않으니까,
다시 말해서 감수성이 없으면 사물의 느낌을 담아 둘 수 없으니까,
작가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강진모, 조각가
시청자에게 수동적으로 전달되어지는 드라마는 , 의미를 전달하려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처럼, 꿈을 꾸게 하며, 생각할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가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테지요.
작가를 키워 낼 만한, 역량이 없는 사회의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마이 프렌즈는 " 저승 가는 것 보다 밭일이 급해" 라며 호미질을 멈추지 않는 할머니의 대사는
이청준 해변 아리랑에서 시집간딸의 불행에 대한 먼 소문을 " 한사코 모른척 귀를 막고 지냈다" 라는 정서와 통합니다.
실은 요즘 디어마이프랜즈라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다시보면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숲 화실에 호랑거미 한마리가 입양되었습니다. 자연 스럽게 줄을 치고, 물소의 머리뼈를 지나치는 장면은,, 언어로 설명 할 수 없는 시詩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