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수필을 쓰셨습니다.
1960년대에 전주 고등학교에 오래 재직하셨는데,전북신문에 고정 칼럼을 가지시고 , 꾸준히 기고 하셨는데,
이백자 원고지의 칸을 약간 넘는 힘있는 글씨체로, 이십여장을 검정 철끈으로 묶어 항상 미리 여러편을 만들어 두시고
자전거를 타고 원고를 받으러 오신 신문사 직원에 건네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한, 4 학년때 쯤부터는 잘 모르면서도 , 매번 아버지의 글을 읽었습니다.
내용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 고정난의 한가운데, 안경쓰시고 약간은 단호한듯, 옆모습 사진만, 또렸하네요..
사람들은 아버지의 글을 좋아들 했던 것 같습니다. 건네는 인삿말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문학이란, 수필의 다른 이름인줄 알았었습니다.
아버지는 운동도 못하시고 음치인데다가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셨기 때문에,
항상 일찍 집에 귀가 하셨고, 약간은 침울 한듯, 마당에서 마당가꾸기나, 큰소리로 신문을 읽으시거나,
장성한 자식이나 동생들, 친척들이 찾아 오면,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시면서,
때로는 바로는 눈치 못채는 유머가 실린, 짧은 말 몇마디,하실 뿐이지만,
그러나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람들은 길고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었습니다.
저도, 아버지 처럼 듣기만, 보기만, 그랬습니다.
늘, 아버지 곁에 따라 다녔습니다.
가자고 하셨던가, 따라 간다고 졸랐던가,
말없이 걷기만 하던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생각하시고, 저는 느끼면서,
스무살이 넘어, 대학에 들어 갔을 때, 방학이 시작되어 귀향 하는 날 아버지는 항상 고속 버스 터미널에서 맞아 주었습니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는 날 에서 하루 이틀 뒤 , 시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하숙집에 전화해서 나간 시간 물어보고 거리 계산 하고
딱 맞추어서( 아니면 하루 종일 기다리셨을 까)
하차장의 벤치에, 짚지도 않으시면서 끌고 다니던 지팡이 옆에 걸쳐 놓고,
제가 버스에서 내려 " 어떻게 올 줄 알았느냐고 ' 깜짝 놀라면 , 의기양양하게, 씩 웃기만 하시면서
짐가방을 받아 들면서, 택시 잡으려고 앞장 서십니다.
방학내, 그때부터는 말이 많아진 막내 딸 재잘 거리는 소리 들으시면서, 여전히 듣고 걷기만 하셨습니다.
본래 부주의하고 실수 투성이라 일처리를 잘못해 당황하면
' 시원 찮은 놈' 하고, 되려 반가워 웃으시며 뒷치닥 거리 다 해 주셨습니다.
걱정하고 조바심 치면 편들거나 달래주시기 보다는 , 세상의 이치를 단 몇마디로,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잘 해결 되었을 때는 얼굴에 수심히 걷히며 환하게 밝아 지셔서,
소심한 성품으로, 애를 끓이셨다는 것을 그때도, 지금은 더 ... 잘 압니다.
아버지, 저는 그래서 지금도, 아무리 큰일이 일어나도, 무사태평, 턱없이 낙관 할 때가 많습니다.
띠지 그림의 세번째 작업입니다. 이런 그림은 상하좌우의 구분이 없지만 , 그래도 작가의 입장에서는 작업 할 때의 위치가 정방향이 됩니다.
구상에서는 프레임 안에 갖혀진 그림이 되지만, 추상 이라면,넓이나 깊이에서 한계 없이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공간도 그렇지만 시간도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 아버지와 같이 있기 위해 기억 속으로 한참 들어가 놀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