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Joy

torana3 2012. 11. 1. 11:55

 

                                                                          5th grade 때 작은아이가 필드츄립을 갔다가 사다준 선물

                                                               

제가 자랄 때는 대부분의 선진 문화라는 것은 유럽을 의미 했습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문학을 탐독하고, 그 쪽으로 유학을 한 학자, 예술가들,

파리와 런던 두도시의 이야기들이 우수한, 선망하는 대상이었으며,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상상하던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어쩌면 정말 먼 나라 였습니다.

웨스턴 뮤비, 리틀 하우스 온더 프레리나, 닥터 캐논, 러브스토리의 하버드 를 알았다 해도

그 넓고 광활한 대지에 무엇을 채우고 있는지는, 짐작 할 수가 없었습니다.

10여년 전 가족이 미국에서 지낼 기회가 생겼을 때, 시작 부터 우리는 초긴장 상태 였고,

만사가 그러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대충 해결이 되고 적응이 가능하다는 경험적 진리만을 되뇌이면서

좌충우돌, 만사, 걸음마 배우는 아이처럼 서투르기 짝이 없었으며,

다 큰 어른 들의 이런 당황스러움을 아이들도 주눅들어 하던 그때.

 

렌트한 집은 우리식으로 보면 타운 하우스인데, 그 곳 에서의 명칭은 아파트먼트 였습니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잔디 밭을 여러 세대가, 조금식 엇각으로 공유하고,

그 너머는 울타리 로 경계를 하여 숲으로 이어지며, 다른 주택 단지와는 1-2 킬로씩은 떨어져 있습니다.

쵸콜렛바 하나를 살래도 자동차 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가장 가까운 가게가, 주유소 뿐이고,

오후 4시만 되면 가족이 모두 모여 이렇게 한가해도 되는 것인가.. 할 정도로,

아무 할일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타운의 짐gym, 넓디넓은 학교 운동장의 테니스코트에 가고,

실버타운옆 퍼블릭 골프장에 가는  스포츠하고는 담 쌓고 살던 생활 패턴을 바꿀 수 밖에.

장보러 가는 일도 온가족이 함께,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널따란 파킹랏에, 웨어 하우스 천장까지 쌓아 놓은 상품 더미들..

( 겨울에는, 강원도 가는 만큼의 거리인 )가까운 스키장에, 동네 나들이 가는 것처럼 간식거리 들고 나갑니다.

비가 와도 공해라는 개념이 없으니 우산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으며, 눈이 오면 집의 벽을 반까지 차오르고

두께가 3-4cm되는 얼음판이 만들어져 살짝  떼어 모아서 쌓아 이글루를 만들고 놉니다.

크고 넓고 한가함속에  여유 느림 고립 밀착 될 필요는 없으나 기꺼이 도와주고 보살피는 관계들..

 

유전자가 소심하고 내세우기를 쑥스러워 하는 닮은 꼴인 가족 중에

그래도 제일 막내가 답답해 튀어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필두로

안정을 찾아 갈 무렵, 현관문을 마주 보는 바로 앞집에 누군가가 새로 이사 오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날, 딩동 초인종. 부부와 10대 초반 소년, 작은 꼬마,  참 밝은 웃음을 가득 담고 서있습니다.

캐나다로 10여년전 이민 온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미국의 회사로 옮기면서 이사온 새로운 이웃이 인사를 온겁니다.

 

다섯살 남자 아이의 이름이 Joy입니다. 캘빈을 닮았습니다.  예의 바른 형과 부모와 달리 고집이 세고, 생기가 넘칩니다.

  자기 집에 없는 것 없는 화려한 것에 비해'모든 가구도 임시, 거라지 세일에서 구한 잡동사니, 연수 초기에 생활비를 아끼느라고 장난감도 별로 없는-

우리집에 오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엄마는 폐가 될까, 못가게 하는라고 진을 빼야 했으며

틈만나면, 몰래, 잽싸게 달려와 초인종을 누릅니다.

집에 들여 놓으면  마치 탈옥하여 자유세계로 온 목표를 달 성 한 듯, 안도로 한 숨까지 크게 내쉽니다.

할로윈 다음날, 캔디 많이 받았니, 라고 물으니,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보며, Candies, 라고 정정해 주던 그 초롱한 눈망울.

조이가 올 때마다, 우리는 서로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고 반가워 합니다.

 

미국식으로 자란 아이들은, 잠시 연수나 유학온 한국의 아이들과 달리, 한없이 어린아이 답고 순합니다.

억척스레 공부하고 경쟁에서 따라 잡으려 하지 않으며 남이 잘하는 것은 쿨하게 인정하고 감탄하며

자기는 별개로 각자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며 , 배려하고 예의 바르고 그러나 자유롭게 놀면서 지냅니다.

우리가 귀국할 무렵,  ' 헤어진다' 는 의미를 어렴풋이 파악하고, 조이의 낙담은 심각했습니다.

특히 우리 작은 아이와는 정이 더 깊어, 발음이 비슷한 이름의 한 글자를 따, 형,형 하고 따라 다녔는데...

 

아침 출근하면서 , 유난히 곱게 든 단풍 산  경치를 보면서, 뉴잉글랜드의 그 마을에서 지내던

마치 연속된 타임라인의 한켠에 따로 있었던 것 같은 그 시절이 조이라는 단어가 연상되며 성큼 의식에 끼어들어..

 눈물이 조금 났습니다.. 단풍이 짙어, 반은 져버린 가을을 보내는 마음인가.. 합니다.

 

 

십대에 매회 빠지지 않고 보았던 미드가 초원의 집과 월튼네 가족 입니다.

연수 중에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 미국적인 것' 에 대한 느낌, 그들의 정서가, 공유가 되는 시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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