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전쯤 제가 속한 모임의 News Letter에 실었던 단문입니다.
휴 가
이번 휴가는 일찌감치 고향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일정을 길게 잡아 오랜만에 넉넉한 귀향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시간이 갈수록 착잡해집니다.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은 불안한 설레임.
상처받은 옛 기억들을 쉬 드러내지 않는다고 환자들에게 채근하던 일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구성이 복잡하고 수가 많은 중에 제일 어린아이였습니다.
그들사이에 일어나는 끊임없는 갈등들. 나는 우리집 낮은 토방에 엎드리어 영화의 장면처럼 그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해도 안되고 판단도 할 수 없는채. 감정이 미숙한데다가 아무도 일관되게 내곁에서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내 사고는 충분히 자유로웠으나, 대단히 어리둥절하였고, 제멋대로 감수되고 입력이 되어 그대로 내 감정의 주종을 이루고
Self 가 되어 버렸습니다.기억의 창고에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내용도 잊혀진 감정의 팩케지들이 쑤셔넣어지고 점점 비좁아 져서
더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게 된것 같습니다. 점점 더 화가 늘고 발작적인 기분이 되는 것도 그때문일테지요.
오래 들여다 보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둡고 습한 창고의 환상을 피하듯이.
뒤져서 버릴것은 버리고 보관해야 하는것은 압축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고향집은 지은지가 오십년이나 됩니다. 지금도 제비가 날아와 집을 드리고, 국민학교 다닐때 심은 종아리 닿던 철쭉이
가슴까지 자라 올랐습니다. 그 아래로 만들어진 습한 그늘 속으로 두꺼비 한마리가 어슬렁 거리며 기어다닙니다.
우리 많은 식구 먹으려 보리쌀 갈던 큰 돌확은 지금은 어머니의 정화수 통으로 씁니다.
냄새나는 재래식 화장실 앞에는 동백나무 몇그루가 울타리 노릇을 해주어 문을 열어 놓고 일을 봐도 무방합니다
옛날 처럼 뒤안 처마 밑에서 다라이에 물 받아 놓고 목욕을 했습니다. 조금 씩 명랑하게 들뜨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나와 내아이들 때문에 기뻐하셨고, 이제 중년이 된 형제들은 옛날 처럼 막내동생을 안쓰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화일을 열어 보아야만 압니다. 기쁨, 행복, 다독임, 그런 것들도 묻혀 있습니다.
휴가에서 돌아와 이전에 우울과 회의에서 같이 헤메이던 내 환자들에게 실컷 용기도 주고 칭찬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족은 죄다 음치라 같이 노래방 한번 간적이 없습니다.
만나서 놀때도 하는일이 이야기 입니다.
때로는 결렬한 토론이 몇 시간이고 지속되는데,
저는 그 안에 감히 끼지도 못했습니다.
마치 권위있는 포럼(Forum)과도 같았습니다. (2008년 아버지 祭日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