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sider Art & Henry Darger

아우슈비츠의 그림

torana3 2020. 2. 6. 13:19

오스트리아 출신 로마인 화가인 Ceija Stojka는 아우스비츠 생존자입니다.

철학자들은  예술로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표현하는 일은 불가능 할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1000여점의 놀라운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점령지인 폴란드의 남 서부에 있는 캠프에  그해 일월 붉은 군대가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발견 할 수가 없었습니다.

퇴각하는 나치는  화장장을 폭파시키고, 가스실을 해체 시켰으며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소련이 75년전 월요일 , 소련이 아우스비츠를 해방시켰을 때,  최소 백십만명 ( 90%가 유태인인)이 살해된 지옥에서 

떠나기에는 너무나 중환이거나  어린 마지막 생존자들을 발견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직후 철학자, 작가들은 죽음의 수용소를 떠올리기는 불가능 할 것이며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신랄한 , 아우스비츠는 야만이었다. 는 말 로밖에는

어떤 예술이나 시적인 관념을 가지고도 그 공포를 명확하게 설명 할 수는 없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프리모 레비의 1947년 회고록'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에 따르면

그 공포를  일깨우는 것은 예술을 통해야만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우스비츠는 역사 속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갔으며  마지막 생존자들도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누구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목소리들만 남아 있습니다.


정식 화가로 교육 받은 적이 없는  스토이카( 1933-2013)는 로마의 소수종족 (흔히 집시라고 불리우는)에 속합니다.

그는 수용소의 학살을 엄청난 힘의 예술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열살에 수용소를 떠나서, 가스실 옆에서 잠을 자고 시체 더미에 숨었으며 나무의 즙으로 연명하며 살아 남았습니다.

자유의 몸이 된 40년 동안 그가 겪은 일들에 대해서 침묵 했으나

그러다가 어린시절에 겪은  말로 표현할길 없는 학대의 장면들이 광시곡처럼 ,

거친색조로, , 광분하듯 ,수치심도 잊은채 ,막을 수 없는 . 봇물처럼 터져나오듯, 그림을 그렸습니다.


                             -2009년작  아우슈비츠 1944. 70년이나 지난 후에도, 분노와 수치심은 전혀 무뎌지지 않았습니다.


1990년부터 죽기전 2013년 까지 천 여점을 작품을 남겼으며 그 중 백 점가량을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전시 하고 있습니다.

막사, 가축 화물칸 , 까마귀와 해바라기, 새디스틱한 카포(유대인 수감자를 감시하는 유대인)와 피골이 상접한 수감자들...

폐쇄된 곳에서의 대량학살의 증언 일 뿐 아니라

 역사의 가장 어두운 사건을 인간의 창의력이 표현해 내고 소유하게 되는 가능성( 필요성이기도 한)을 보여줍니다.


유목민의 말을 판매하는 집안의 육남매 중 하나로 태어 났으며 로마어와 독일어를 사용하였고

오스트리아가 점령 당한 후로는  유랑 세활을 접고 비엔나에 정착합니다.

그후 그의 가족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타겟이 된 집시들을 멸살하려는  로마 대량학살(Roma Genocide)에 희생이 됩니다.

1943년 3월 아우스비츠에 도착에 도착해서 그녀의 팔에는  집시를 뜻하는 Z-6399 라는 문신이  새겨집니다.

이 미소를 띤 사진에서 그녀는 팔뚝의 문신을 (훈장처럼)자랑 스럽게 드러냅니다.



스토이카가 일곱살에 그린 밝은 그림 한점이 전시 되어 있습니다. 스카프를 두르고 천막집( 캐러반) 옆에서 ,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서있습니다.

 해바라기밭이 마치 불꽃놀이 같습니다. 버드나무의 알록달록한 잎사귀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오르게 합니다.


   가장 비참하고 현대적인 작품은 붉은 손과 팔이 검은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사라져버린 신을 의미하는 것 같은 하얀 기둥으로 막혀있는 그림입니다.


                                             1995년 untitled


                                    그가 추방될 때 탔던 가축 화물칸을 그렸습니다. 금방 부숴질 듯한  낡아 빠진,

                                            뒤 창문은 철창으로 막혀 있으며, 하늘은 핑크와 오렌지 화이트로 거칠게 채워져 있습니다 


일년 남짓 아우스비츠에 머무는 동안의 그림들은 눈을 땔 수 없는 긴박함의 연속입니다

로마(집시족) 인임을  표시하는 스카프를 두른 수감자들은 막사의 안에서  ,카포들이 가축용 채찍을 휘두르고

 묵묵히 시체를 실은 수레를 지나 행진하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팔을 하늘로 뻣은 채  사람을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향해서 걷습니다.

보라색 하늘은 화장장에서 나오는 하얀 연기로 뒤덮여 탁해져갑니다.

새들은 V자, 철창은 X자로,  얼굴이 없는 몸들은  점차 검은 선으로만 그려집니다.


Credit...

그림의 대부분은 카드보드에 그려졌으며 손가락을 사용한 것도 있습니다.

이들 그림이 트라우마를 그린거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견뎌낼 만큼의 개인적인 슬픔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어떤 작품은 제목을 " 이것은 일어났다" 라고 덤덤하게 말합니다.

 유대인 학살에 비교하여 로마인의 학살에 대해서는 연구가 많지는 않으나 ,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집단 청소라는 이름으로 극우 주의자들에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나머지 로마 수감자들이 하룻밤새에 모두 가스실 처형이 되기 일주일 전에 스토이카의 가족들은 다른곳으로 이주 하였으며

 1945년에 벨젠 벨센 Bergen-Belsen,으로 옮겨졌고  이 마지막 캠프에  냉혈한 명령이 떨어졌고  묵시록의 끔찍한 광경이 펼쳐집니다.

어둠속에서 해골들이 뒤엉켜있는 검은 땅 앞에 불길이 치솟고

눈위에 쓰러진 한 수감자는 고글을 쓴 것 처럼 보이는 눈으로 철조망에 앉아 있는 한쌍의 검은 새를 바라봅니다.

영국이 벨젠 벨센 수용소를 해방시키자, 스토이카와 어머니는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를 걸어서 비엔나로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유랑 생활을 계속 이어갔는데, 그 후 카페트 판매일을 했으며 1988년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인 커렌 버거의 격려로

그녀의 생존 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으며, 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로마뿐 아니라 전유럽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 했습니다.

생존자들이 점차 수명을 다하면서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도  줄어 들것입니다. .

그로부터 멀어 질 수록 그 공포는

나치당 들 조차 스스로 흡족해 하는 오스카 상으로 호도된 Jojo Rabbit 영화 처럼 키치나, 가벼운 오락 거리로 변질 될 수 있습니다.

도서관이나, 스트리밍 서비스에 너무나 나쁜 예술들이 넘쳐납니다.

아도르노가 맞았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침묵 하는게 나을 것입니다.


    간추림 from https://nyti.ms/2t2QPrh


글을 읽으면서  몸의 통증을 느낍니다.

세월호의 가족들이 묻어 두기 보다는 계속 해서 - 잊지 않기 위해 - 말을 하려는 것들이 얼마나 뼈 아플지 알 수도 있을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