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전후 혼란기,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전체주의적 사회 분위기가 만연한 가운데,
문화는 자연스럽게 데카당스 적, 유미주의, 퇴폐적 낭만주의 가 젊은 세대의 돌파구 였습니다.
그 당시 케세라세라( que sera sera)라는 팝송이 국내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어린 제 귀에도 익숙해 그 경쾌한 리듬을 뜻도 모르면서 흥얼 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될 대로 되라 라는 의미로 번역 되면서, 자조적, 자포자기 의 의미가, 그 시대 상을 반영하면서 유행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도리스데이의 노래 가사는 앞날에 대한 걱정을 하는 어린 딸에게 어머니가 들려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무엇이 되든 , 될거야...(whatever will be, will be)
금강경의 한귀절입니다.
應無所住하여 而生基心이라니
응당히 주한바 없이 그 마음을 내 일것이다. 로 해석됩니다.
부다는 수보리와의 대화에서 부처님의 큰 도를 깨달은 성현의 이름-수다원 ,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을 들면서
진실로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과 대답을 반복 하면서 이끌어 내는 결론입니다.
아무리 좋은것, 드디어 성인의 류에 들거나 망념이 슬쩍 든다해도 흔적없이 지나듯 할 수 있다던가,
완전히 벗어나. 다시 돌아 오지 않는 다든가, 멸도하여 구경의 진리에 들었다 해도
이름을 얻는 다는 것 자체가 아, 인, 중생, 수자생에 들러 붙어 있음이라.
부처님 조차도 법을 얻었다고 말 할 수 없다... 합니다.
미인이 될수 있을 까, 부자가 될 수 있을 까, 유명해 질 수 있을 까, 행복 할 수 있을 까,,
평생, 이름을 바꾸어 가며 얻기를 갈망하고,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살아 갑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잡으려 천신만고 끝에 그에 도달한 들, 그것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 이름일 뿐입니다.
잡초 처럼, 돌멩이 처럼, 삼라의 만상들은 실은 이름으로 규정 할 수 없는 단지 현상입니다.
어찌 될른지 알수 없습니다. 단지,오직 모를 뿐이며, 또한 오직 할 뿐입니다.
그런거라고,, 중생을 연민하는 부처님이나, 자식의 마음이 평온 하기를 바라는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불안해 하는 마음을 달래주고 싶은겁니다.
어느날, 심란한 마음을 , 토로하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 한마리가 어디서 나타나 한참을 이렇게 빤히 바라봅니다. 신기해서 전화를 잠시 끊고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전송했습니다.
" 고양이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동물이래요..."
멀리 있는 친구가 전화로는 모자란, 위안을 마치 현현이라도 한듯, 나타난 고양이를 빗대어 위로를 던집니다..신기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