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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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ana3 2011. 11. 24. 09:23

어머니는 제가 태어난 후  근무하시던 학교의 숙직실에서 수유를 하셨으니, 정년까지 일을 놓으신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먼 친척, 어머니의 동생뻘이신, 분이 저를 키우셨는데, 지능도 그리 높지는 않으셔서,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보호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던, 건방진 짓을 했지만,  

제가 자라서 그분이, 강아지나, 아기들을 좋아하고, 잘 다루시는 것을 보고,

나도 그리 사랑을 받았겠구나, 짐작만 할 뿐, 기억에 남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서너 살 무렵, 가족과 떨어져 타지에 발령을 받아 근무 하셨고, 저는 나머지 가족, 아버지, 그 분이 저를 보아 주셨다는데,

너무도 선명하고 유일한 기억은, 어머니가 잠시 자신의 근무지로 데려 가셨을  때,

학교에 가신 어머니를 기다리던, 그때 ' 어머니의 부재' 가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집에서도 항시 아기옆에 누군가 붙어 돌보던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 혼자' 가 처음은 어니었을텐데.

그 집의 마루, 햇볕, 마당에 흔들리던 그네...꽤 오랫동안, 그 기억이 살아 있었던 것이, 실제의 상황이었을겁니다.

짧아도 강한 정서를 유발 하는 것이, 어머니를 찾는 본능적인 유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말이 통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가까운, 관계 였지만,

엄마의 역활외에, 분명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가지고 계셨으며,

저로서는 다른 어머니와의 비교가 안되었으므로, 그러려니.. 그런 형식의 모성의 이미지를 형성했을 겁니다.

결혼후, 시어머니는 ,, 그분 역시, 꽤 큰 농가의 안주인으로, 애를 돌보기보다는,

안팎의 농사일,  드나드는 일꾼, 손님, 대접이 큰 일이었지만,,

그러나, 좀 다른 것은, 그것은 '자신을 주장하는 삶이 아니었고,

자식에 대해, 아무런, 판단과 비판이 없는, 원을 들어 주는 것일 뿐, 제어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주지시키는 ..

그런 일은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계셨고, 자식들이 하는일을, 그런가보다, 그렇게 하는것이 맞나보다,, 들어주거나, 힘이 부치면, 그냥, 애타고,

정한수 떠놓고, 빌고, 음식을 하면서도 빌고, 가까운 절에 보따리 머리에 이고 가 치성드리고...

저 또한 사회적 활동이 대단히 분주하거나, 성취를 위해 애를 쓰는 삶은 아니었지만 내 직업에 대한 책임감, 열의가 있었으며,

또 나름의 나의 선호, 취향도 상당히 즐기는 편이라, 아이들에게 항상, 관심, 육아 제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애들이 하는일에 대해, 장, 단점에 대한, 제 주관이 자꾸 앞서서, 불필요한 불안과 우려를 먼저 내색합니다..

 

물론, 세상의 관점이나, 초자아의 형성을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대상이 필요 하겠지만,

세상의 누군가는, 가없는 큰 사랑을 주면서도, 그에 대한  아무런 책무도 지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람이 하나 쯤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 엄마의 역활이라는것이 굳이 필요한 시기도.. 다 지나 버린 것 아닌가..

 

The Help 인종차별,, 그런 주제지만, 저는 줄곧, 어머니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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