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결혼을 해서 첫해에 시아버님이 돌아 가시고, 그후 이십여년,
가부장적인 농촌 집안의 주부 였던 시어머니는 내놓고 무엇을 주장하지는 않으셨지만,
의지가 강하시고 사리 분별이 정확하셨던 , 가족의 정신적인 지주 셨습니다.
그 큰 힘을 끌고 나가는 방식 중의 하나가, 음식이였다고 생각합니다.
근면함으로 자수성가 하신 아버지로 인해, 나중에는 동네의 부자 집이었다해도,
가난한 집에 시집오신,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아,
양식이 부족해 야채를 잔뜩 넣은 밥이나 죽도, 가족의 추억의 음식이 되어 휴가 몇칠 동안에
한끼정도는 청해 먹는 메뉴였고,
객지에서 허튼 짓을 해서 속썩이고, 돌아 온 자식에게도,
텃밭에서 금방 뜯은 어린 배추로 세끼 다른 김치를 해 내시는 정성을 들이셨습니다.
논 농사는 다 남 내준 후에도, 집주위의 밭에는 사시 사철 야채를 심고,
거두고 삶아 말려 갈무리 하시고,
가까운 군산이나, 강경에서, 해물과 젓갈을 사들이시며,
아주머니들과 야산에 제일 맛 좋은 버섯을 따러 다니셨고,
동네에 누가, 도랑이나 저수지에서 민물고기를 잡았다는 소리를 들으시면, 얻어다가
손질해서 얼려 놓으셨습니다.
이런 그간의 노고는 숨긴채, 자식 들이 귀향하면, 아주 쉬운듯, 한상 차려 내시고,
만족 스럽게 시식하는 모습을 곁눈질로만 보시며, 애정 표현은 꾹꾹 숨기셨습니다.
아들만 많은 집에, 다들 과묵하고, 화목하지는 않은 분위기로
명절에 한번 씩 모이면 누구 한명은 언성을 높이다, 먼저 돌아가 버리고
어머니는 매번, 마음에 상처를 받으시면서도, 자식들이 다 모여주기를 원하셨으나,
이런 반복이 싫다고, 이번에는 내려가지 않겠다고 못되게 굴어도
구구절절 요구를 안하시고 바로 체념에 버리셔서 불효에 대한 죄책감이 생길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나이로, 점점 늙어 갑니다.
자식들이 사느라고 분투를 해도, 같이 애달아 할 뿐, 도움을 주기에는 힘도 지혜도 줄어듭니다.
그래도, 저 어릴적, 만족하게 해주던 방식, 좋아하는 음식을 해먹이고 싶은 주책이 자꾸 동합니다.
남성주의 전 시대적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페미니즘의 역행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끈질기고, 원초적인, 모성의 본능...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