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월동 준비

torana3 2024. 11. 20. 12:08

월동 준비라는 어렸을 때 많이 쓰던  단어를 한참 궁리 하다가 찾아 내었습니다.

 

1. 근무지의 제 방은  근처에 재개발 사업이 차례로 진행 되고 있는 구 도심의  오래된 건물의 3층에 있습니다.

진료실과 별도로 마련해 준 이 구석방은  저에게는  가장 만족스러운 근무조건입니다.

처음 부임해 올 때부터 방풍용 에어켑 비닐로 창문을 덮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고 반 투명에 가까워 

창 밖을 내다 볼 일은 없었습니다. 간 혹, 도무지 경로를 짐작 할 수 없는 매미나 파리 같은 벌레들이 

비닐 안의 창틀에 말라 죽어 있어, 그 부분 만 칼로 잘라서 꺼내고는 했습니다. 

천성이 무얼 꾸미고 바꾸거나 새로 물건을 사드리는 일에 무심 합니다. 

옆 방의 후배가 근처 커튼 가게에서 세일을 한다고, 블라인드를 달면 어떻겠냐고 제안 하여, 좋은 생각. 

우선 먼지 낀 방풍 비닐 부터 뜯어 냈습니다. 

 산뜻한 암막 블라인드를 내리고 라디에이터를 켜놓으니 아늑합니다만

저는 눈 오시는 날에는  블라인드를 위로 바짝 올려 붙이고 잿빛 하늘에서 펄펄 내리는 눈을 감상할 기대로 

설레입니다. 

 

2. 올해도 어김 없이 팔십이 훨씬 넘으신  시골의 큰 시누님이 김장 김치를 보내 주셨습니다

' 배추의 속이 차지 않아 ' 한상자 밖에 못 올려 보냈다고 미안해 하십니다. 

택 배 상자에  큰 글씨로 ( 성을 뺀)  남편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동생들, 자손들 , 그리고 친척들 까지 다 챙기느라고 상자 마다 이름을 적어  구분해  늘어 놓았을 겁니다. 

마치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들리는 것 처럼 울컥합니다. 

 

3. 겨울을 좋아 하는 이유가, 단지 그 계절에 태어 났다는 것 만으로 알았는데.

 추위를  피하여  아늑한 동굴에 숨어 들어 가듯,  그 부산하고 들뜨는 월동 준비의 기억 때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물가에 산처럼 쌓여 있는 배추,  잔치 같았던 김장 날의  이웃 아주머니들, 동무들  다 같이 하는 식사,  감따서 항아리에 짚 놓아가며 갈무리 , 연탄 수백장,  창호지 새로 발라 마당 담벼락에  세워 말리던 문짝들, 그리고 새로 사주신 오버코트와 털신.   몇 다라이나 쒀 서 장독대 위에 식힌 동지 팥죽을 , 이불 뒤집어 쓰고  먹던일... 그리운 어머니...

제가 있는 곳 하늘에는 기러기와 비행기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창호문과 우물은 제 오래된 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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