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태어났을때 친 할아버지와 할머니, 외할아버지는 돌아 가신 후였고 외할머니 한분만 계셨습니다.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동백기름 발라 정갈하게 빗어서 쪽지신 은비녀가
나중에는 빛이 바래져, 몇가닥 안남은 할머니 머리카락에 힘없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당신 자손을 얼르고 안아주는 다정한 분은 아니셨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던 어머니는 어려서 못났다고 야단도 참 많이 들었답니다.
할머니는 고집이 세시고 자주 노여워 하셔서 어머니랑 다투시기도 했었지만
그 시대 다른 여인들 처럼 풍상을 겪으시면서도 자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어머니' 다우셨습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아마.
왜냐면 어머니의 형제들과 제 사촌들에게 항상 중요한 분이셨고 제 추억의 갈피마다 자주 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몇 칠 어머니 대신에 할머니가 데리고 다녀 주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학교 밖 모퉁이의 하꼬방 노점에서 크고 하얀 찐빵을 한개씩 사주셨습니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산밑의 부잣집에서 부드러운 하얀 빵을 먹다가 산위의 할머니 그리워 할 때
저는 그 빵을 떠올리며 읽었습니다.
할머니가 서울의 다른 자식들을 보러 갔다가 내려오시는길에는 역앞의 가게에서 손자들을 주려고 사탕 한봉지를 꼭 사셨습니다.
다른 것은 절대 안고르시고 왕드롭프스라는 갖가지 빛깔의 과일향이 나는 그 사탕만 찾으셨습니다.
할머니가 새색시 시절 부터 쓰시던 반닫이 옷장에서 우리는 술래잡기나 보물 숨기기 놀이를 했습니다.
(오래된 옷장은 비 현실의 세계로 아이들을 데려갑니다)
제가 결혼 하고 레지던트 수련을 받고 있던 30년전 어느날, 일하다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 바쁘면 내려 오지 않아도 된다. 하셨습니다.
눈물이 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 몇 해 전 큰 외삼촌이 간암으로 돌아 가셔서 망연해 하시고
제일 사랑하시던 노총각 막내 삼촌이 결혼하셔서 아이를 나았을 때 기뻐하시던 모습,
그 훨씬 전 대학 일학년 때 어머니랑 동해안으로 셋이서 여행을 갔었던 일들이 차례로 뇌리에 스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들을 훌쩍 뛰어 넘어 제 기억은 감미롭게, 찐빵과 사탕, 은비녀와 반닫이로 건너가 머뭅니다.
2. 다운튼 애비의 귀여운 할머니 바이올렛의 어록 모아 봅니다
- 희망은 우리를 가지고 논다. 현실을 직시 하지 못하도록
-연민이 부족 한 것은 눈물이 지나친 것 보다 못하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듣는 것보다 더 지루 한 것은 없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 낼 수는 없어도 많은 것을 이겨 낼 수는 있지
-그는 남자잖아 !!( 이 할머니는 인간적인 실수도 많이 합니다.
손녀인 이디스가 미혼모가 되었을 때, 가문의 평판을 걱정하여 아기를 입양시키려 하자 이디스가 아기를 데리고 가출 합니다.
며느리인 코라에게 할 수 없이 사실을 밝히려 하면서 아버지인 로버트도 알아야 되지 않냐고 공모자인 딸이 말하자.남자는 그럴 권리가 없어도 된다는 말.)
세익스피어의 후예들 답게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담긴 멋진 대사들이 감탄스럽습니다.
3. 할머니랑 찍은 사진들이 있을텐데 결혼 하면서 어디다 두었는지... 늦기전에 찾아 놔야 겠습니다.
부쩍 지난 일들을 추억 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사진 을 찍던 날 있었던 그날 일들을 지금은 압니다. 언젠가는 그 서글프거나 격했던 느낌의 기억들이 하얗게 사라져 버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