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 지기 위하여
오랜만에 방에 들어와 앉아 봅니다.
실은..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같아 , 자제하는 중입니다.
제 스스로 그런 줄 알지 못하고 살아 왔는데,
지나치게 진지함과 이상만을 생각한다는, 평가를 들어서이기도 합니다.
아니라고 항변해 보았지만,
무소가 제 피부가죽의 무거움을 느낄 수는 없을 겁니다.
저에게 맞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달리 본다면, 그럴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여고 시절, 한 선생님 께서 제가 자주 한숨을 몰아 쉰다고 지적 한 일도 있고,
이십대 초반에 사고 방식이 노인 같다는 핀잔을 들은 적도 있으니, 아 사실인 모양입니다.
실은 언제나 , 비교해서 볼 때 살면서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강한 체하고 현명한 태도를 가장 해 본다 해도 그러다 조금만 힘에 부치면
내 던지고 달아 날 궁리 부터 해 왔습니다.
누구에겐가 제 짐의 무게와 부당함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도, 실은 엄살일 뿐이라고, 그것은 제가 잘 압니다.
그러나 고통이라는 것은 빅터 프랭클 박사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공기 중에 확산이 되는 것 처럼, 작은 것이라도 곧 정신의 전체를 차지 해 버립니다.
누구나에게 자신의 고통이 가장 무겁고 중한 것입니다.
때로 가벼워지기 위해, 더 강한 느낌과 비교해 보는 방식이 있습니다.
글랑불루의 주제는 가볍게 지상으로 돌아와, 그 깊은 심연에서의 감각들을 이야기 해주기 위해 다시 내려 간다 하였습니다.
바이오피드백이라는 장치가 한 때 인지 행동치료의 보조로 사용 된 적이 있습니다.
이완을 위해 긴장상태로 만들어 서서히 풀어 주는 방식을 컴퓨터 라이즈 해서 인지에 되먹임 하는 일인데,
역시 가벼움을 훈련하기 위한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절대자의 존재를 토템과 초자아로 인간이 만들어 낸것이라 역설 하였고,
지옥이 세상을 지배하는 듯한 참혹한 전쟁의 이후에 사람들은 개인의 실존으로 역시 신의 질서를 부인 하려 했지만,
그래서 얻는 것은, 더한 불안과 고독입니다.
또 다시 무거워 집니다. 휴~~
제가 그러는 사이에 가을 이 왔다가 가버렸습니다.
오늘 아침 하늘을 봅니다. 그 한없이 비어있는 공간을...
" 수보리야, 너는 허공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 허공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이는 털이 다시 자라서 멋진 모습이 되었지만, 야성의 충동은 돌아 오지가 않습니다.
먹이를 구하는 수고도 적을 두려워 할 공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그의 삶은 이처럼 평온하고 게으른 대로... 지속 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