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아버지

torana3 2024. 12. 30. 09:24

1919년 생 아버지는  농부의 맏아들로 태어 나셨다. 

왜 그런지, 아버지의 아버지는  격식을 싫어 하셨다. 

8월 무더위에 돌아 가시면서도 자식들 더운데 상복 입히지 말라 하셨다. 

 

삼형제 모두 대처의   학교를 보내셔서 아버지는 서울의 보성전문학교(상과) 를 나오셨다.

바로 스승인 인촌의 배웅을 받으며 , 곧 돌아오라는 약속을 뒤로 하고 

고향의 중학교에 임시로 교사가 되었던 것이 평생 교직에 몸담게 되셨다.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서 건 10년 간을 전주 고등학교에 교감으로 남으셨다. 

때가 되어 교장 승진과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셔야 했는데 

명석한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 떠나지 않으셨다. 

교과 를 맡지 않았지만 교사가 비는 수업에 들어가 , 

아무때나 수학이나 영어 국어 수업을 진행 하셨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학생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기셨다. 

그렇지만 살면서 꼭 필요하지도 않는 물리나 수학공부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고 

졸업 한 후에 스승에게 인사 오는 것은 , 자기일이 바빠서 찾아 오지 않는 제자가 더 자랑 스럽다고 ,

시대에 앞선 사고를 가지셨던 것 같다. 

  유사이래 서울대에 기록적인 숫자로  입학 시켰던 것으로 유명했다 

제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다는 것은, 집에 놀러 오는  오빠들의 친구들이나

내가  자라서 만난 나의 스승이었던 아버지의 제자들의 말을 들어봐서 알 수 있었다.

 

재직중에 당시  충격적인 방화 사건이 일어 났다. 

멀리 떨어진 우리집 마당에 까지 재가 날라 오던 그 밤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의 상사였던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불 속에 뛰어 들어 가려던 것을 

아버지랑 다른 사람들이 붙잡아 말렸다 한다 

( 그 옛날 어른들은 확실히 책임감과 용기가 있었던  같다 . 지금 보다는 훨씬)

 

아버지는 그 사건으로  드디어 학교를 떠났다. 

미리 움직였더라면 그 보다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을 

이제  황토흙바닥이 아직도 고르지도 못한 교사만 덩그러니 있는 시골의 신설 중학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기에서도 전념을 다해 학교의 꼴을 만들고 

1회 졸업생은 가장 많은 수를 전주의 명문 고등 학교 에 입학시켜서, 

나의 동급 생도 그중 있었다.

 

그 후 두어 학교를 옮기셨지만, 

환갑이 지난 어느날( 당시 정년은 65세였는데)  돌연 퇴직을 하시겠다고 선언 하셨다.

전 만큼   일 할 수 없으신 것을  스스로 깨닫고, 이만 하면 되었다. 고 결심 하셨습니다.

그 후는 아직 직장에 다니던 어머니 대신 나는 주부다( 夫) 며 선언 하시고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그 당시 태어난 우리 큰 아이에게도 , 깊은 애정을 주셨지만 얼마 안있어 뇌줄중을 맞으셨고 

내가 두째를 임신해서   몸이 무거워  뒤뚱거리고 다니는게 안쓰러우셨던지, 

 애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시원하겠다 " 한말 씀 하시고 는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고 소식을 들어 가 뵙지도 못했다. 

 

아버지 는 , ' 이만 하면  충분하다' 고 그만 두어야 할 때를 아셨습니다. .. 

 

아버지가 초대 교장으로 부임 하셨던 그 학교 입니다. 3년전에 들러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