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아이히만 쇼
우연히 찾은 반값 세일 하는 영화입니다.
어제 포스팅 하면서 피아니스트를 인용했기 때문에 연관이 되었을겁니다.
제가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는 한번씩 열어 보게 되는 이유는 ,
영화 안의 감독 허위츠의 시각과 유사 합니다.
유태인 학살이라는 세계사적 사건이 얼마나 잔혹한 인간의 행위였는지를 낱낱이 고발하는 ,
유대민족이 자신들이 겪은 핍박을 전세계인에게, 절규하고 싶은 이유로 방송을 제작하고 진행하는데 비해,
특별히 초빙된 감독 허위츠는 모든 사실적 기록보다도 아이히만 개인에 촛점을 맞추고 그가 인간적인 모습으로 무너지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집요하게 매달립니다.
그 이유는 "아이히만은 파시즘이라는 이념으로 만들어진 인간에 불과 하며, 악은 지극히 평범한 모든 인간에게도 촉발 될 수 있으며
그래서 오만 해서는 안되며 그래야만 훗날 같은 일이 반복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 본 무술 영화에서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며 ,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 복수를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는 희생자들이 있었습니다.
" 복수는 달콤하지.."
다운튼 애비에서 안나가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 곤경에 빠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자신의 마음을 자책하자
베이츠가 웃으면서 달래주는 장면입니다.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치유의시작입니다. 아프다 울고 받아 주는 환경이 필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아프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한다는 소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간절한 일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게다가 저지른 죄가 클 수록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일은
엄청난 죄값을 치뤄야 하거나 자신의 전 존재를 부정해야만 하므로 철저하게 방어를 합니다.( 무의식적인 정신행동입니다)
피해자가 증언을 하던 중 고통으로 쓰러져 몸부림 치는 장면을 보아도 아이히만은 감정의 동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특별한 괴물들이 있어서, 그들이 자신을 파멸시킨 악의 근원이며 복수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아무리 공감해준다 해도 해소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고통을 끊어 내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그릇된 죄가 아직 익지 아니하였으면 어리석은 자는 편안하고 고요하지만 그것이 익은 때에는 저절로 큰 죄를 받는다. -법구경
때가 있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리를 보기에 우리가 아는 생은 너무 짧아,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내세를 상상하도록 했나봅니다.
산사나무 열매입니다.
선물한 이가 아래 계곡쪽을 바라보도록 모신 것을 집 주인이 마주 볼 수 있도록 돌려 놓으셨답니다.
나는 밖을 보면서 판단하고 조작하고 주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이 바라보는 나, 세상이 말해주는 나, 나를 고요히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