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seeing)의 과학과 정신-Josef Albers
순수함(Purity)이란 단 한가지로 귀결됩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입니다.
긴 시간 동안 점점 더 범위를 좁혀가며 색채기법에 헌신했던 ( 강박적이라 말할 수는 없는) 조세프 알바(Josef Albers)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것은. 철학자는 외부세계로부터 문을 닫고 정신적인 훈련을 하도록 요구했다면
화가는 세계로 향하여 문을 열고, 환시적 몰아지경에서 섬광처럼 빛나는 그 세계를 장인의 섬세한 접근으로
눈과 손을 훈련하여 예술의 작업을 발전시켰습니다.
뉴욕의 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그의 전시에서 단일한 마음 single mindedness이 어떻게 확장되어 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1988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집짓는 목수이며 페인트공인 아버지로 부터 실용적인 기술을 배웁니다.
"문에 페인트를 칠할때 가운데 부터 칠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옷소매를 버리지 않는단다 " 라는 것 들입니다.
소매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반복적인 훈련은 그를 열렬한 학생이며 선생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예술과 장인정신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해야할 일을 알게 됩니다.
바우하우스는 멀티테스킹을 장려 했습니다.
알바는 옆에 어떤 색을 놓느냐에 따라 어떻게 강도와 무드가 바뀌는가를 탐구하는 색채 추상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꾸준히 색채에 몰두하고 바이마르에서, 가구제작, 스테인드 글라스 제작,사진 작업등을 해나갔습니다.
“Color Study,” included in “Josef Albers: Grey Steps, Grey Scales, Grey Ladders.”
사진이 그 시대에는 아직 예술 매체로써 중요하지 않았고 그의 그림도 몇 점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진 작품 16점 을 one And one is Four ( 하나, 그리고 하나는 넷이다)라는 주제로 전시되고 있습니다.
사진 작업을 하던 1928년에서 1932년 사이에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올겼으며 사진학과는 학교의 기념품을 만드는 곳 같은
역활을 했는데 유명한 교수들 -폴 클레, 엘 리스즈키, 오스카 쉴레머, 그리고 자신의 아내인 애니와 친구들의 스냅사진을 찍는 정도 였습니다.
El Lissitzky
Oskar Schlemmer
알베르는 한사람의 여러 이미지를 판지위에 배열해 놓습니다. 이것은 엄밀히는 초상사진이라기보다 블랙, 화이트 ,그레이의 사진의 톤으로 한 구성입니다.
건축물이나 풍경사진의 콜라쥬에서 이러한 색채추상 표현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데사우의 정원을 겨울과 봄의 한쌍의 사진은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사진으로 또는 수직 줄무늬 패턴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70점의 사진 콜라쥬 작품이 남아 있으며 나치를 피해 아내 애니와 미국으로 건너와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칼리지와 예일대학에서 교수로 지냈습니다.
1950년대 기념비적 작품 Homage to the Square ( 사각형에 대한 경외)는 그의 다음 작품의 대부분을 점유하게 됩니다.
이번 전시에서 바우하우스 이전의 잉크 풍경화에서 부터 디자인 연구를 하던 블랙마운틴 시절 까지를 잇는 가교적인 작품들로 훌륭하게 선택된 전시 리스트들입니다.
중첩된 사각형의 반복적 구성요소로 된 Homage 시리즈는 전적으로 색채에 관한 것입니다.
색채란 알베르에게 광학적인 것 뿐 아니라 감정의 변화 도구이며 투사하는 장치였습니다.
명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에게 북아메리카의 하늘이 그러했던 것과 같습니다.
Homage to the Square A 는 62세의 작품으로 한가운데의 칡흑같은 밤의 검은 조각이 석탄의 잿빛 사각형안에 있으며 이들은 옅은 황백색의 사각형안에 둘러싸입니다.
페인트를 칠한 문 처럼 보입니다. 이로부터 많은 색의 변주들이 만들어 집니다.
규칙적인 게임이면서 지각의 명상이기도 하는 이 작업들은 색채가 다른 색채와 어울릴때 일어나는 시각적이면서 정서적인 가치를 갖게 됩니다.
같은 방식이 진행되면서 은유적인 의미를 발전시켜나갑니다.마음이라는 틀로 보여지면서 1962년 작품 황토색 회색 검정으로 이루어진 Homage는
The Ivory Mist 라 부제가 붙은 ,대지의 말러풍 노래 같은 이미지로 마돈나가 없는 두초(Duccio)의 현대적인 성화와 다름 없습니다.
이러한 색채 인식은 과학적으로는 시신경의 간상체와 추상체 ( rods and cones)의 작용입니다. 알레스는 그것을 잘 알고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내가 착색 되어지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가 " How it feels to be colored me"라는 1928년 아프리카계 아메리칸 소설가이자 인류학자인 조라 닐 허스턴 의 에세이에서 " 순백색에 던져질 때 나는 가장 강하게 착색되어진다 "라는 문장처럼 알베르는 색의 상대성, 변하기 쉬우며volitile , 때로는 정치적political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정치적 으로 어려운 시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딱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관심을 받는 교수라 해도 그의 예술은 민감한 폭탄에서 비켜있는 , 고도로 빛나는 창작물로 취급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순수에 관심이 없었다해도 그의 본질은 그랬습니다.
그의 작품에 깊이 다가갈 수록, 그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온 Dicipline에서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산만함을 막을 버퍼( 반- 클릭베이트anti clicbait와 같은 )
수도자의 헌신, 정상이라 고 말하는 모든 형태에 대한 저항과 같은 행위입니다.
인생의 후반에 그가 한 작업은 색의 상호작용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회적인 힘이 만나거나 충돌하는 작용과 유사 하다는 암시입니다.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라도 당신이 눈을 뜨고 보면 삶과 연관이 되어 있으며,미학과 윤리가 하나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참고:Josef Albers’s Science and Soul of See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