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야기

뭉크의 절규와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 I

torana3 2016. 2. 19. 14:35

한겨울이나 여름이 절정인 시기에 오슬로를 방문해보면 에드워드 뭉크Edvard Munch의 예술의 기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알게된다.

어두움을 간신히 헤치고 비추는 태양의 빛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에서 뭉크와 그의 영향을 받은 독일작가들의 유화와 판화 작품들의 전시,

"뭉크와 표현주의Munch and expressionism" 라는 타이틀로 열리고 있으며

고독한 밤midnight-blue의 벽에 점멸하는 램프의 불빛처럼 걸려있는 그들의 작품에서 오슬로의 빛과 어두움을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뭉크는 그의 조국인 노르웨이가 낳은 화가임에 분명하지만 , 이 전시회에서 그가 세계적인 미술사의 일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예술은 20세기 초반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자신 그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당시의 유럽의 분위기는 자유주의자liberationist들의 욕구가 분출되고 동시에 세기말적인 두려움이 팽배하여

  현실파괴적인 예술의 형태가 불꽃이 튀며 요동을 치는 형국이었고 이는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에게서 엿볼 수 있다.


뭉크는 1892년에서 1908년까지 독일에서 살았으며 이 시기동안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의 예술과 사고가 무르익게 되었다.

1863년에 태어나 오슬로에서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보헤미언적인 글쓰기와 급진적인 정치참여를 하면서 보냈다.

그 후 파리로 건너가서 그 당시의 트랜드를 받아들였다.

1889년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 " 아픈아이The sick child" 는 오슬로의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으며 munch the sick child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그의 나이 15세에 죽은 누이 소피라는 소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 그의 인상주의적 스타일이 아카데믹한 자연주의를 고수하는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그의 명성은 점차 퍼져나갔다.1892년 베를린에서 열린 개인전이 당대의 예술가들의 논쟁에 휩쓸려 중단되기도 했으나 그는 더욱 주목을 받고 이름을 알리게 된다.  뭉크논란Munch Affair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는 베를린에 16년간 머무르며 자리를 잡았다.

이당시에 munch “Madonna,” “Puberty,” “The Screa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마돈나 munch “Madonna,” “Puberty,” “The Screa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사춘기munch “Madonna,” “Puberty,” “The Scream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절규

등 유명한 작품들의 초기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위예술가들중 선구적 위치에 있었으며 , 이들 작가 독일의 에리히 헥켈, E.L. 키르히너, 막스벡크만, 칼 스미츠 루둘프,

비엔나의 에곤 쉴레, 리차드 거슬들은 뭉크의 20년이상 나이가 어렸다. 뭉크는 소위 표현주의로 불리게 되는  근대미술의 새로운 조류의 실제적인모델 이었다.

 그들은 뭉크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고갱이나 반고호와 같은 과거의 영웅들에게서같은  , 격렬한 의지로  충동에 이르는, 극단의 감정을

담을 수  예술의 역활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성, 정신적인 혼란, 초자연적, 영적, 이상향에 관한

최첨단의 스토리, 새로운 세기의 태도를 뭉크에게서 발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시대적 상황이나 뭉크의 개인적인 요소도 개입되고 있다. 그는 그보다 젊은 아티스트들이 경험하지 못한 19세기 말,

낭만주의적인 시대를 살아온 경험이 있다.

그리고 4세에 결핵으로 어머니가 죽고 14에 누이의 죽음을 에 뿌리를 둔 그의 예술에 고착된 죽음이라는 주제는

 훗날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지구멸망의 환상Amagedon이 스며든 표현주의작품의 병적인 우울함 과 연결이 된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이든 젊은 예술가들은 뭉크로부터 배웠으며 뭉크역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영향력과 친밀감 "의 형상들이 이 작고, 어스름한 교회같은 갤러리안에서 쉽게 드러나 보인다.


1895년 파스텔화인 스크림은 지금은 대중적인 이미지이지만 당시에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새롭고, 깊은 인상을 주었다. 


Edvard Munch’s 1895 version of “The Scream” in pastel


“Man on a Plain,” a 1917 woodcut by Erich Heckel, who looked to Munch for inspiration.

 전쟁중에 야전병원에서 트라우마를 겪었던 헤켈의 목판화 평지에 서있는 남자. 전쟁터로 보이는 곳에 서서

혼란스러운듯 머리를 감싸고 서있는 남자의 모슴은 뭉크의 절규하는 사람과 유사하다.


Self-Portrait With Raised Bare Shoulder,” by Egon Schiele, a follower of Munch.

1910년 쉴레의 수채화 자화상.  실존적 소멸의 공포감에 휩싸여 충격을 받은  ,

 머리가 외계인처럼 크게 부풀고 입술은 극심한 동통으로 오! 라고 소리지르는 모습.


쉴레가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뭉크는 베를린에 있지 않았다.

1908년 알코올에 의한 정신병으로 보이는 질환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퇴원후 오슬로로 돌아갔다.

그는 독일에서 표현주의에 접해서  영향을 받고 그의 자품은 더욱 빛이 났으며  사실주의에 추상을 접목시켜 창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스타일은 여유롭고  해가 질 무렵의 찬란한  태양처럼 밝아 졌다.

1894년 사춘기가 어둡고 경직되어 있었다면 1914년의 작품은 부드러운 붉은 빛의 표현주의로 변화한다.

  1894      1914



http://www.nytimes.com/2016/02/19/arts/design/review-the-darkness-and-light-of-edvard-munchs-work.html?ref=design&_r=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