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현대사

torana3 2016. 1. 26. 08:17

문득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현대사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나의 세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나의 한국현대사라는 유시민씨의 책을 보면  동시대로( 그분처럼 역사에 직접 뛰어 들지는 못했으나) ,저도 아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1965년 베트남 전쟁 파병

군가를 부르며 놀았습니다.

월남 파병 군대의 군가"...님들은 뽑혔으니..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드라도.."

모르는 어휘가 나오는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그런가사를 목청껏 부르고 다녔습니다.

극장에서는 본 영화 시작전에 월남소식을 포함한 대한뉴스라는 필름이 의무적으로 상영되었습니다.

( 꽤 오랫동안 극장에서 영화 시작 전에 애국가가 나오는 영상을 보여주고 관객들은 서서 의례를 해야 했는데,

언젠가 친구사이인듯한 외국인 세사람이 일어나느니 안일어나느니 하면서 서로 실갱이 하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동네 아저씨가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 오셨을 때 티브나 가전 제품, 초코렛, 레이션 박스를가져오셔서, 구경갔다가 얻어먹던 기억도 납니다.

1968년-  3학년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씀 하셨습니다.

밤에 따로 테스트를 하셔서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덕에 학교에서 제일 빨리 암송하여 상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못 외우면 다 외울 때까지 집에도 못가고 그랬습니다.

1969년 -4학년 같은 반에 웅변을 잘해서 전국대회에서도 상을 받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팔을 뻗으며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외치는 웅변도 했었습니다.

이승복 어린이 사건이 그때였나봅니다.우리는 " 구름도 쉬어가는 운두령 고개.. 라는 노래를 배워 불렀습니다

1970년 - 5학년 새마을운동 제창. 이때부터 주구 장창 새마을 노래를 부르고 , 새벽에 빗자루 들고 나가 거리를 쓸고

( 아 그 어스름, 보랏빛으로 열리는 기린봉을 바라보는 순간, 새벽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초가를 걷어내고 붉은 스레트를 똑 같이 올려졌습니다. 눈으로 보기는 아름답지 않은데,  그래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 했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이 간첩신고와 새마을 운동이라는 단어 입니다 .나중에는 지겨워 졌습니다.(물론 사춘기들어서는 몇년 후 부터)

이때 학교에서 고전 읽기라는 특별활동을 했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뿐 아니라 단테의 신곡, 논어 이야기 같은 것도 오학년이 읽어야할 고전이었는데,

어렵고 재미없어  열심히 안했고 상은 못받았던 것 같습니다.

( 정신의 개조를 목표로 개인의 취향을  다수의 국민에게 강제하는 대단히 비교육적인 행태입니다) 

 

1971년 - 제7대 대통령 선거(박정희 후보 당선).

 선거 때마다 뒤숭숭했습니다. 공설운동장 같은데서 선거 유세를 하면 , 우리 꼬맹이들도 들떠서 몰려다녔습니다.

 국회의원 사진이 박힌 달력을 한장씩 얻어 집집마다 안방에 붙여놓아서 누가 국회의원인 줄은 알았습니다.

그 해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경상도 사람들은 모두 결집해서 선거를 하는데 전라도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지역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을 추앙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철없는 소리를 한다고 뭐라 힐난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1972년 -아마 세째오빠의 서울대 졸업식에 갔었을 때 일겁니다. 당시에는 대통령 부부가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밝은 주황빛 한복 저고리차림이었는데

몇년후에 총격사고가 났을 때 어머니는 그때 사실은 너무 눈에 띄는 색깔이라  걱정 했었다고 마치 당신이 예견 하신 것 처럼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오빠나 언니들이 서울로 시험 보러 가면 전주역으로 아버지 어머니랑 배웅을 나갔습니다.

 뿌연 연기를 내뿜는 기차가 겨울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고, 그들을 싣고 떠나는 일이 해마다 있었습니다. 그 때 어른 들은 무슨 생각일지, 저야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는 어김 없이 어머니 아버지는 대학 졸업식을 보러 가셨습니다. 이때는 고속버스를 탔던 것 같습니다. 일일 생활권이라는 말, 예쁜 승무원들이 사탕이나 롤케익을 서비스해서 그 것도 기대하는 즐거움중의 하나였습니다. 항상 서울 이모집 근처의 여관에서 머물고, 식이 끝나면 종로의 한일관에서 불고기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중학교 일학년 가을,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다가 학교선생님에게 들켰습니다. 아무말도 안하셨지만 어떤 결과일지 빤합니다.

심란해서 세상이 망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집에 돌아 왔는데, 그날이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었습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이 사정하셔서 정학은 면하고 교무실에서  벌받는 것이 저에게는 훨씬 큰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후로 유신을 찬양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서양식 민주주의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의미로 ,갓쓴 노인이 양복을 입고 있는 그림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한자 사용을 금지해서 저희세대는 그 중간에 걸쳐 읽기는 겨우 하는데 쓰는것은 잘 못합니다.

외래어 사용을 금하자면서 말도 안되는 신조어들이 난무 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1973년 - 유신정우회 창립. 김대중 납치 사건.

1974년 - 긴급조치 1ㆍ2호 선포. 민청학련ㆍ인혁당 재건위 사건.

1975년 - 장준하 의문사. 

   신문에도 안나오는 그 사건들은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간첩사건들이 의례 조작이다.고들 쉬쉬하면서 말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방학때 오빠들이 과격한 말이라도 하면 아버지는 놀래서 걱정 하시고 타이르기도 하셨습니다

신문이 백지 상태로 발간되고 일반 시민의 작은 광고들로 광고중단을 항의 하던 동아일보 사태도 기억납니다.

  75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영부인의 피격이 있었습니다. 화환과 태극기로 장식한 지하철이 달리는 장면과 뒤이어 기념식에서 총격장면과

 기념사를 의연하게 끝까지 마치신 대통령에 대한 찬사가 신문을 도배했고 우리는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학도호국단, 군사훈련을 받느라고 뙤약볕에 애들이 실신해 쓰러지기도 했지만 인권침해나 그런 생각들은 할수도 없었습니다.         

  

1978년 - 대학에 입학하고나서, 한동안은 표면적으로 조용했습니다.

연속되는 긴급조치로  데모도 소강상태, 캠퍼스는  산울림의 록, 아바, 토요일밤의 열기와 심수봉과 대학가요제, 디스코로  들떠있었지만,

운동권 아이들의 조직적 움직임이 항상 있었고 우리는   마냥 가벼울 수는 없었습니다.

1979년 -  YH 사건. 부마 항쟁. 10ㆍ26 사태. . 12ㆍ12 사태.     

     그해 가을 저는 친구와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짓다 말고  " 대통령의 유고- 처음 듣는 단어 였습니다- 라는 말이 방송에서 긴박하게 반복되었습니다.

     학교의 정문이 폐쇄되고 휴교령이 언제 풀릴지 몰라,  집으로 내려 갔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는 둘다 울었답니다.

     12월 12일 저는 불교반 친구들과 금산사의 대웅전 앞에서  한 밤중에 종교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고,

       군에 간 막내오빠의 부대는  쿠데타 세력들의 명령으로  서울 근교에서 주둔 중이었고,

      '우리가 저들을 위해 개죽음 당해야 하느냐고 ' 울분했었다고 나중에 말해 주었습니다.

1980년 - 2ㆍ29 복권조치 단행. 5ㆍ17 쿠데타. 광주민중항쟁.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개학을 했지만 수업은 거의 못했습니다.  넓은 계단 강의실에 수업 받으러 들어가 보면 서너 명만 앉아 있고

 할 수 없이 본관앞 광장으로 나가 먼발치에서,  데모하는 제자들과 마주보고 서 계신 교수님들 중에'

예과 일학년때 , 무속의 문학강의를 신명나게 하시던 교수님의 난감한 표정을,

 그분에게 야외수업을 받았던 개나리꽃 그늘 아래서 훔쳐 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휴교령이 내려 졌습니다. 이제는 정말 기약이 없습니다.

 고속터미널에 가보니 왜 표사는 사람도 없는 광주행 티켓 매표소 앞에 나무 의자들을 높게 쌓아 바리케이트를 쳐놓았는지... 

위압적 공포감 조성. (저는 가끔 무모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광주에 가 볼 수 있을 까 잠깐 그런 궁리도 했었습니다.

 

9월이 되어서야 수업이 시작 되었습니다. 열렬하게 데모에 참가 했던 몇명 급우들이 학교로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몇달동안 단 하루도 못쉬고 밤 늦게 까지 밀린 진도를 따라 잡아야 했습니다.

 단체 유급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교수님들이 엄포를 놓는것을 믿지는 않았어도  차라리 그렇게 정신 없이 바쁜것이 나았습니다.)

밤 늦은 시간 실습하다가 잠시 쉬러 나오면 어두운 계단 한 구석에서 남자 아이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들의 서클 밖 언저리만 돌았습니다만,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인지, 혼동스럽기만 했습니다.

 

학교  수업 빠지고 영화 보러 다니고, 연극과 그림 전시장에 갔습니다. 종로 서적의 한구석에 주저 앉아 문학이나 철학 책을 뒤적 거렸습니다.

몇 칠이나 혼자서 여행도 다니고, 더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나이드신 부모님 혼절 시킬 선언도 했습니다.

완전히 유급을 당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진급하고 나서 대충  마무리, 졸업은 했습니다.

 

그리고 이날까지 수련과 결혼, 정신과 의사가 되어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리 말도 안되는 혹세무민은 없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런 긴 비망록을 적는 이유는 문득 어떤 기시감(deja bu) 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 사십년전에 유언비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헀었습니다.

그 시절에 온갖 끔찍한 사건기사가 신문의 사회면에 실렸습니다. 지금처럼.

선사시대부터 살인사건과 범죄는 일어 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온국민이 세세히  알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새로운 일도 아니고.

그러느라고 훨씬 중요하고 공론화 하여야 할 많은 일들이 모르는채로, 또는 알면서도 외면하면서  묻혀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