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받을 용기에 대한 다른 생각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랍니다.
아들러의 논거를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 형식으로 쓴 철학서적-마케팅 용어로는 자기 계발서로 분류하는 것 같습니다만-입니다.
세기말과 이십세기의 초반에 육체와 분리되는 정신의 병과 치료에 획기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세 거장,
프로이드와 융, 아들러는 정신의학이라는 분야를 신의 영역, 과학적 기술의 영역으로부터 분리 시켰습니다.
동시대를 살면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이들의 이론이 조금씩 다른 것은 , 그들의 출생의 배경, 성장과정과 성격의 차이 인 듯 합니다.
즉 자기가 생각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정신을 규정 한 것이지요.
젊은 여자와 재혼한 프로이드의 아버지는 이미 노쇠하고 약한 노인이었고 대신 이복 형이 능가 하기 힘든 젊은 아버지 뻘이었습니다.
유아기, 아동기 부터, 죽음과 성욕, 질투, 의 갈등을 느낄 만 했겠지요,
융은 섬세하고 병약한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한 채로 목사이며 권위적인 아버지의 절대적인 영향하에서 자랐습니다.
내성적이고 외롭고, 신비적인 세계에 심취해 있었으나 현실의 권위적인 아버지의 강력한 신념에 두려워 하는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혼재된 여성성과 남성성, 게르만적 외면적 가치와 전통, 낭만으로 인간의 정신을 이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들러는 셋중 가장 평범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보여 집니다.
두 거장이 심층 심리학에 끝없이 파고 들었다면, 그는 인간 관계, 개인, 현실 생활에서 갈등에 대한 賢者적 해석과 답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점으로 그의 이론을 현대인들이 받아 들이기가 수월 한 듯 합니다.
그러나 이들 초창기에 이루어진 정신의학은 일단, 단일이론으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 구조의 변화입니다.
인간은 카멜레온 처럼 주변의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정신의 구조가 변합니다.
즉 과거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며 느낍니다.
두번째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입니다. 인식의 기전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사고와 행동이 무의식이 아니라, 세포차원의 화학적 변화에 의한것으로
아들러가 말하는 것처럼, 의지적으로 용기 있게 변화 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유전적인것, 서서히 이루어지는 인격의 변화, 또는 중간중간 개입되는 외계의 영향( 정신 사회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위해요소)
들이 총합 된 것으로 현재 내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세번째는 - 같은 말 일 수도 있는데-
현대에는 개인-individual-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입니다. 개개인은 그 시스템의 일부이면서 또 따로 살아있고 행동합니다.
나 개인이 나의 존재에 대해 분석하고 용기를 내고 변화하려는 시도가 무력해 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무리 뇌과학이 발달했다 한들, 현 인류가 자신의 생을 소멸할 때까지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약물이나 기술을 발명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생로병사의 苦를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재의 인류가 행복해지는 것은 어떤 방법에 의해서인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것, 그럴 힘이 있는 사람들이 비젼을 제시 하는 것,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 가치에 상관없이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보살 필 줄 알며, 안심하고 사랑을 받는 것,
개인이 아니라 작은 단위집단에서라도 이러한 정서가 오고 갈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가 즐겨그리는 그림 중의 하나입니다만, 이런 그림이 나올 때마다 많이 답답해집니다. 우선 테두리를 지어 가두어 둡니다.
모호한 윤곽에서 무언가 구체적 형상을 잡아 내려는데 강박적이 됩니다.
그저 열려진 채로, 흩어 진 채로, 미완성인 채로 두어 둘 수 있는 여유가... 쉽지 않네요
사람들이 추상Abstraction을 하는 이유는 경계를 허물고 싶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한정된 공간에 한계적 표현만으로는 답답합니다.
작은 캔버스안에 광대함, 심연을 넣을 방법은 추상 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히 구체적인 사실만을 고집하는 경우에는 때로 정신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