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기
3월 부터 시작 되었던 공부 모임이 어제 끝났습니다.
아홉명 밖에 안되는 작은 집단이지만 소박하고 정스러워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얻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근처의 식당에서 자축 회식을 하는데,
이력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학에서 강의 하시다가 퇴직 하셨다 알고있던 그 신사분이 서울교육대학의 교수 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글자를 익히기도 전,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시절에 교대 라는 말에 익숙했습니다.
어머니는 60년대 중반 부터 20년이 넘게 전주 교육 대학에 재직 하셨습니다.
인봉리의 집에서 늘 같은 길을 따라, 철길 건너고 전주천 다리를 지나, 히말라야 시다가 아름다운 그 교정으로 출근하셨습니다.
가는 길에 언니들이 다니던 여학교가 있었는데, 어느날 담장 너머로 어머니를 발견한 언니가 반가워 소리쳐 불렀었답니다.
같이 있던 친구들이, ' 너네 어머니 철학자 같다' 했었답니다.
한동안 심한 신경계 질환을 앓으셔서 고개를 잘 들지 못하셨는데다, 낡은 겨울외투를 수십년 입으셔서 그리 보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무튼 교육대학의 축약해서 부르던 명칭인줄도 모르면서 저에게 교대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외양, 상징이며 기호와 같은것이었습니다.
그 학교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사랑하셨습니다.. 일본어 책과 잡지를 참고하여, 시골의 척박한 문화에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셨습니다.
그 시절 가난하던 제자들은 어머니의 열정에 따르며 같이 밤늦도록 신문도 만들고 연극을 연습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가, 강의를 마치고 나오시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그 교정에서, 연구실과 도서관에서 놀았고, 몰리에르와 베케트의 희곡이
연극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제가 그 교수님께 넌즈시 말씀드립니다. 어머니가 전주교대에 근무 하셨다고.
처음에는 전주에 상호 교환의 업무로 가셨던 추억으로 반가워 하시더니, 잠시후에는 어머니의 성함과
언젠가 동남아 연수를 같이 간적이 있다는 것 까지 기억해 내셨습니다.
그때 같이 갔던 여자 교수님이 세분이었는데. 협소한 트윈베드 숙소에서 어머니는 기어이 바닥에서 주무시겠다고 고집을 부리셔서
훨씬 아래연배이신 그분 들이 몸둘봐를 모르게 죄송했다고, 존경스러운 분이셨다는 찬사와 더불어 일화를 들려주십니다.
그 때가 제가 대학에 다니던 때 입니다. 어머니를 마중하러 일부러 상경하신 아버지와 김포공항의 입국장에서 기다리는데,
우리를 발견하고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좋아 하시던 어머니의 기쁨이 플리쉬백됩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시간은 빙글빙글 돌아서 내 옆에 다가섭니다.
어머니 제가 그 나이 되어있네요, 저도 어머니 처럼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고집스럽게 사양하고,
사람들과 벌이는 문학이나 종교 , 예술에 관한 토론이 즐겁고, 그리고 때로 삶의 묵직한 근심들로 수심에 잠기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회갑 생신때 제가 선물한 흰 코끼리 한쌍
어머니는 한복 저고리에 통치마를 중년의 나이까지 고집하셨는데
어느날 갑자기 양장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마 주위분들의 애정어린 권유를 많이 받으셨을겁니다.
저는... 철이 없게도 어머니의 변신에 심술을 내었습니다. ... 대학신문 주간을 하실 때 편집 하시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