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ddhist

자작나무 숲을 그리며

torana3 2015. 4. 6. 09:27

 

주말 신문의 오지여행 기사에 실린 인제의 자작나무 숲, 사진 보고 그렸습니다.

 

어제는 부활절이라, TV에서 옛 종교 영화를 여러편 보여줍니다. 벤허. 아마 여러번 반복해 본 것으로는 거의 선두일겁니다.

지금까지 종교적의미로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인으로서, 인간의 본연적인 고뇌로 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며,

어제는 후반 부터 보았습니다. 멧셀라는 부상을 당하여 죽어 가면서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습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의 힘, 권력만이 그의 신앙이며,  타인의 불행에 대한 죄의식, 연민이 없고 라이벌에 대한 경쟁심과 승리 욕구만이 그의 정신의 전부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 째 뒤바꾸어버린 멧셀라에 향하는 복수만을 꿈꾸며 스스로를 단련해 온 벤허가,

어깨를 늘어 뜨린채, 석양을 향하고 서있는 장면. 또 다른 절망의 모습입니다.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섰을 때, 인간적인 승리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행복인가.

산상수훈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을 미래 시제로 약속합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행위에 대해서는 현재시제로 약속합니다. ( 단순한 기쁨, 피에르 신부)

- 마음이 가난 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두가지 조건은 사람이 자신의 욕심과 안전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만약에 미래에 이에 대한 보상이 분명치 않으면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그 일은 무엇 보다도, 그 일을 하는 행위 그 즉시에 보장을 받는 다고 가르칩니다.

'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마음을 먹는 것은 미래의 보장이나,  누군가의 인정認定을 바라고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지속적인 성품일겁니다.

 

 

 

 

 

하늘밭 화실의 최용건 화백의 자작나무 숲. 

저는 눈에 보이는 사물의 형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합니다.

아마 자작 나무 숲에 들어 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과의 교감, 나의 인식에 들어와 하나가 되어 새로운 형상을 창조 하는  작업은 못했을겁니다.

그러나, 그러려는 노력이 언젠가는 비슷하게 되어지지 않을까.. 그림이나 종교적 심성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