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athy, Empathy
비밀의 정원 색칠하기. 꽃과 나뭇잎을 신물이 나게 그리는 중입니다.
레지던트 수련을 받았던 80년대의 중반, 정신의학은 의학의 한분야이나 정신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가 모호했던 시절이라,
철학적 방법을 익히는 것이 더 우세 했습니다.
그게 매력이라,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던 아웃사이더들이 지망하는과이기도 했지요.
현재는 그당시보다 정신에 대해 생물학적인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고는 하나,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은 여전히 비슷한 수준인 것 같습니다.
인간을 실존적인 해석에서, 사회적 존재로 범주화해서 분석하고 해법을 제시하는것으로 흐르는 경향이지만,
어찌보면 치료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편리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왜냐면, 저희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슨일이든, 심각한 고행이 수반되는 것이 당연하고도 옳은 방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니다.
섣불리 안다고 그 말을 해석이라도 하려들면 주장자를 내리치며 아직 멀었다,호통을 치는 그런 분위기의 훈련이었습니다.
당시 화두처럼 들고 다녀야 되는 용어가 Empathy 입니다.
그래서인지, empathy 라는 단어는, 절대적 秘意라도 가지고 있는 듯, 도저히 그 실체에 도달하기 어려운 신비적인 ,
하여간 저는 그랬습니다.
오늘 아침 블로그를 열다가 이전에 친구신청해놓았던 한 블로거의 새글에 눈이 갑니다.
자비慈悲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기 경전을 나오는 자비의 마음을 어떻게 낼 것인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대한 석가세존의 대답입니다.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 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이러면 될 것 같습니다.
'불쌍하다고 여기는, 상대방에게 불쌍함을 당하게 하는' Sympathy 와는 구분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병원에 근무할 때, 잠깐, 복도에서 스치는 한 환자분에게, 잠시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다.
' 저 사람과 내가, 입장이 바뀌어 있을 수도 있다..' 그 분이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제가 환의를 입고 있는 모습이 문득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주변에 제가 Empathy의 뜻이 이렇다고 말해도,딴지 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알아냈다해도 마음을 내어 행동으로 실천 할 수 없으면, 여전히 아직도 모르고 있는것이나 다름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