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비오는 여름 , 일요일입니다.
거실 창문 전체가 무성한 푸른 나무의 바깥풍경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뭇잎 하나하나가, 까치나 매미소리의 반주에 맞추어 꼿꼿이 빛을 향하는 무더운 날 이나
고개를 숙이고, 가는 나뭇가지에 함께 매달려,거풀거풀 흔들리며 태풍을 견디는, 비오는 날,
여름이 매혹적인 이유입니다.
실용적인 남편은 이 집으로 이산 온 내내, 어둡고 습하다고 불평이지만,
저는, 맞장구를 쳐주기는 하지만, 이 나무들의 가을 단풍을 한번 더 못보고, 이사해야 하는게 내심 서운합니다.
2. 나와 나 아닌것의 경계를 만들어 가며 살아 왔습니다.
, 시간을 쪼개어 채워 넣고 분별하고 분류 하면서, 만들고 세워온
그 울타리들이 무너지고 새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 만큼의 세월에, 이제는 다다른 듯도 합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불어 나가는 것처럼, 태양이 뜨고 지면서, 순간의 궤적을 이어가는 것 처럼,
세상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3. 절두산 천주교 성지를 다녀 왔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 동네에 살았는데도 관심의 밖이라 가본 적이 없습니다.
순교란 정신의학적인 입장으로 볼때는 종교적 강박 내지는 편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상적인 정신상태란 본능의 충동과 초자아의 억압을 적절히 타협하는 이고의 스테디한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학적인 행복의 경지는 미흡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항상 어느 정도는 불행해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종교의 깊은 사색, 수련은 그래서 진전이 되지 않고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포기 하고 살아 온 것이, 제 울타리 중의 하나입니다.
4. 잘 조성된 교회와 공원이 예쁩니다. 정성을 다하여 아름답게 꾸며서 영성을 현현하려는 흔적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
탁희성 화백의 복자 열전 예수님 십자가 처형의 날을 묘사한 일련의 부조물 들도,처연하고 아름답습니다.
( 제 고향에서 일어난 일이네요, 풍남문 앞에서 윤기춘의 순교 장면입니다)
5.순교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순교는 죽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에도 어긋 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하느님의 사랑도 자비로움이지, 공격성은 아닙니다.
순교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분노와 증오와 다툼에 대한 희생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죽음을 명하는 자는 단지, 말이 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명한 피해자가 고문당하고 죽는 시간에 그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단지, 불필요, 악이라 규정, 나와 다른 것, 또는 나의 존재와 힘의 과시, 나에게 가해질 것이라고 여겨지는 위협으로부터
' 어떤 존재'를 제거하고 싶었을 겁니다. 제거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자기 악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면, 고통에 몸부림 치며 무력하게 겁에 질려있거나
체념하고, 때로는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숭고한 태도를 직접 체험 할 수 있었다면 자신의 행위가 악이라고 두려워 했을겁니다.
순교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대해 남을 공격하고 싸우지 않으며 상대의 악 마져도 받아들입니다.
지금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직접적인 만남이 없어 그의 눈동자와 슬픈 목소리를 느끼지 못한다면,
타인의 고통에 아랑곳 없는 공격적이고 때로는 악의 명령들은 제어되지 않은 채 실행이 될 것이며,
악은 더욱 평범해질 것입니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
백색 순교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일상에서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말이랍니다.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희생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저는 아직 큰 결심은 서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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